나는 팔로군(八路軍) 입니다

나는 팔로군(八路軍) 입니다

6·25 南侵(남침)의 선봉부대는 모택동의 팔로군이었다.

‘잊혀진 전쟁’, ‘원치 않은 전쟁’, ‘불쾌한 전쟁’으로 불리면서 ‘역사의 고아’(orphaned by history)가 된 6·25 전쟁은 61년이 지난 지금 우리에게 어떤 기억으로 남아 있나. 유엔군 병사들이 “비기기 위해 죽어야 하느냐”(to die for a tie)면서 참전 의미를 냉소적으로 표현했던 잊혀져 가는 전쟁, 하지만 우리에게는 잊을 수도, 잊혀져도 안 되는 것이 6·25 전쟁이다.

1950년 6월25일, 인민군 제6사단 제15연대가 개성(開城) 송악산을 넘어 개성시내에 진입한 시간은 대충 새벽 4시30분에서 40분경으로 기억한다. 나는 그때 18세였고 개성 송도(松都) 중학교 학생이었다. 송악산 기슭에 있던 기숙사엔 북한에서 월남한 학생들이 대부분이었고 나도 그 중 하나였다. 송악산 기슭엔 아직도 새벽의 어둠이 짓게 깔려있었다. 새벽은 언제나 거룩하게 느껴지는 것처럼 그 날도 아무 일 없다는 듯 여전히 고요하고 성스러운 새벽이었다.

기숙사 식당에서 느닷없이 뛰어내려온 학생의 전갈은 기숙사 주변에 국군이 쫙 깔렸다는 숨넘어가는 소식이다. 인민군을 국군으로 잘못 본 것이다. 학생들은 앞 다투어 본교 지하실로 대피했고 잠시 후 지하실 창문으로 그림자처럼 희미하게 비친 물체는 포복자세로 교정을 뒤덮은 인민군들이었다. 이때가 새벽 4시40분경이 아닌가 싶다.

인민군이 개성시내에 진입하면서 철도경찰과 약간의 전투를 벌인 것 외에는 별다른 저항 없이 인민군은 개성을 점령했고, 날이 밝으면서 학생들은 모두 등교하라는 하교 측의 지시가 시내에 전달됐다. 학생들은 인민군 환영대회에 참가했다. 거기서 학생들과 인민군 사이에 좌담회가 열렸다. 개성 시내 한복판에 10여 명씩 모여앉아 인민군 장교와의 대화가 시작된 것이다.

내가 앉은 자리엔 40대 후반에서 50대 초반으로 보이는 고급장교가 왔다. 얼굴엔 구레나릇 수염이 시커먼 전형적인 군인이었다. 틀림없는 인민군 군복을 입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말이 쏟아져 나왔다. 자신을 연대장이라고 소개하며 “나는 八路軍(팔로군)입니다. 우리가 개성 시내에 들어올 때까지 한명의 희생자도 없었는데 개성 시내에 들어와서 병사들이 개죽음을 했습니다”라며 울분을 토하는 것이 아닌가.

개성 송악산을 넘어온 방호산(方虎山) 소장(少將)의 인민군 제6사단은 모택동의 팔로군 출신으로 구성된 부대다. 이들은 6·25 전쟁에 참가하기 위해 1950년 6월18일 사리원에서 기차로 개성 북방에 배치된 역전의 노장들이었다.

“나는 팔로군입니다”

브루스 커밍스 같은 수정주의자들과 김일성과 그 추종자들의 北侵論(북침론)이 날조라는 사실이 한 순간에 폭로되는 역사적 순간이었다. 하지만 당시 나는 그 엄청난 말을 듣고도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전혀 몰랐다. 하지만 6·25 전쟁이 공산권 붕괴의 원동력이 되었다는 세계사적 사실을 전쟁이 끝난 뒤에 알게 되면서 북괴군 6사단 15연대장의 “나는 팔로군입니다”라는 말이 한국전쟁 발발의 역사적 배경을 설명해 주는 귀중한 증거라는 사실을 알았다.

모택동은 1949년 7월 약 2만2000여 명에 달하는 팔로군 소속 조선인 부대를 6·25 남침(南侵)을 준비하는 김일성에게 넘겨주었고, 이들은 이동하는 기차 안에서 인민군복으로 갈아입었다. 김일성은 이들을 6·25 남침의 주력으로 삼았다.

한편, 스탈린은 전차(戰車) 300대, 전투기(戰鬪機) 200대, 대포(大砲) 1300대, 군사고문 3000명을 보내 김일성의 6·25 남침을 적극 도왔다. 6·25 한국전쟁은 이렇게 스탈린, 모택동, 김일성의 치밀한 계획 하에 꾸며진 세계 공산화 전략의 일환으로 일어난 공산침략 전쟁이다.

한국전쟁은 이처럼 스탈린, 모택동, 김일성의 철저한 한반도 공산화 전략에 따라 준비된 계획적인 침략전쟁인데도 중국 공산당은 아직도 자신들의 음모를 철저히 감추고 ‘되놈’ 근성으로 일관하고 있다. 차기 중국공산당의 유력한 지도자 습진평(習近平・시진핑)은 “위대한 抗美援朝戰爭(항미원조전쟁)은 평화를 지키고 침략에 맞선 정의로운 전쟁이었다”며 “60년 전에 발생한 전쟁은 제국주의가 중국 인민에게 강요한 것”이라고 했다.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6·25 전쟁이 일어나기 전, 1949년 7월에 6? 남침에 대비해 중국 공산당의 팔로군 약 2만2000여 명을 김일성에게 넘겨주어 김일성의 인민군을 대폭 증가시켜준 장본인이 바로 모택동이다. 그 때 미국이나 한국은 김일성이 스탈린과 모택동을 등에 업고 남침하리라고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이렇게 역사적 사실까지 뒤집으며 한국전쟁의 성격과 의미를 공산당 식으로 짜 맞추지만, 진실은 언제나 들어나는 법이다. 거짓말도 백번 되풀이 하면 진실이 된다는 공산당의 사기술도 이제 공산당 역사박물관으로 가야 할 신세가 됐다. ‘소련의 팽창주의에 대한 봉쇄정책을 처음 실행했다는 점에서 한국전쟁은 20세기의 중대 사건’이라는 미국 역사학자들의 평가처럼, 6·25 전쟁은 소련의 세계 공산화 야욕을 차단하고 세계질서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공하며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자유와 인권의 가치를 새롭게 조명한 전쟁이다.

한국전쟁에 대한 평가와 인식은 각자의 주관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6·25 전쟁에 미 육군 공수 부대 장교로 참전해 오른쪽 팔과 다리 하나를 잃은 윌리엄 웨버(84) 예비역 대령은 “2차 세계대전이 민주주의를 위해 싸운 전쟁이라면, 한국전쟁은 세계를 공산주의로부터 구했던 전쟁”이라고 평가했다.

사실이 그렇다. 한국전쟁은 세계 공산화 전략으로 시작된 전쟁이었고, 스탈린, 모택동, 김일성의 야욕을 꺾기 위해 국군 사상자와 행방불명 99만, 미군 피해 15만, 남북한 민간 피해 약 200만과 중공군 피해 90만이라는 엄청난 대가를 치렀다. 하지만 그처럼 엄청난 역사적 의미를 지닌 한국전쟁의 기억이 서서히 61년이라는 긴 시간 속에 묻히며 빛이 바래고 있는 가운데, 한국전쟁에 대해 혐오감을 가지고 있던 미국의 전쟁 다큐멘터리 작가 존 톨랜드가 그 혐오스럽고 지루한 한국전쟁에 다시 관심을 가지게 됐다는 사실은 반가운 일이다.

공산권 붕괴를 지켜보며 6·25에 대한 시각의 변화를 느낀 톨랜드는 그의 저서 《6·25 전쟁》에서 “비록 미국 국민에게는 인기 없는 전쟁이었지만, 6·25 전쟁은 미국이 더 많은 번영을 구가할 수 있도록 국민경제에 큰 활력소를 제공했다. 그리하여 경제적, 군사적 힘이 남아 돌만큼 국력이 신장됨으로써 어떤 국제분쟁도 미국의 관여 없이는 해결될 수 없게 되었다. 결국 6·25 전쟁은 팍스 아메리카나를 탄생시킨 것이다”라고 긍정적인 평가를 하고 있다. (조선일보 이한우 기자의 해석 참조)

‘잊고 싶은 전쟁’, ‘잊혀진 전쟁’으로 ‘역사의 고아’가 된 한국전쟁, 그런 가운데 美 해병 4000여 명의 희생자를 내며 세계 최악의 전투로 불리는 장진호 참전용사들은 “우리는 잊혀진 전쟁의 잊혀진 사람들이다. 이대로 역사 속에 묻힐 수는 없다”고 외치며 1995년 워싱턴에 한국전쟁 참전 기념공원을 조성하고 장진호 전투에 참전한 美 해병동상 19개를 세웠다.

그들은 그 기념공원 벽에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Freedom is not free)라는 글귀를 새겨 넣어 자신들의 값진 희생을 역사에뿐 아니라 인류양심에 인정받으려 했다. 이처럼 6·25 전쟁은 자유를 위한 전쟁이었기에 결코 잊을 수도 잊어서도 안 되는 전쟁이다. 한국전쟁의 의미가 바로 여기에 있다.

어떻게 보면 6·25 전쟁은 ‘비기기 위해 싸운 전쟁’ 같지만, 우리에게 준 역사적 교훈은 한국 현대사뿐 아니라 세계사의 진로를 바꾼 대사건이다. 공산주의에 대한 인식을 바꾸어 놓았고,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에 새로운 가치를 부여하며 세계 공산주의 종식을 최대의 목표로 삼게 되었다.

‘악의 제국 소련’이 붕괴되면서 6·25 전쟁은 세계 공산주의의 종식을 위한 위대한 전쟁이었다는 역사적 평가를 받게 되었다. 단순한 남북한 간의 내전이 아니라 민주주의와 공산주의의 사상적 대결장이었던 한국전쟁은 확실히 세계사적 의미를 가진 국제전이다.

한편 ‘한국전쟁(This Kind of War)의 저자 페렌바크(T.R. Ferhenback)는 “한국전쟁은 힘을 시험한 전쟁이 아니라 의지를 시험한 기묘한 전쟁”이라고 했다. 사실이 그랬다. 물론 유엔군의 막강한 전력도 큰 힘이 되었지만 그 보다는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건국주역들의 대한민국 수호와 국가미래 보장에 대한 강력한 ‘의지의 힘’이 전쟁참화 속에서 국가번영의 기틀을 마련했다고 보는 것이 올바른 역사해석이 아닐까.

6·25 전쟁의 開戰(개전)과 停戰(정전)을 직접 눈으로 보고 체험한, 어쩌면 전쟁 마지막 세대인 나로서 전쟁 61주년을 맞는 감회가 왜 이럴게 착잡한지 모르겠다. 아마도 6·25의 의미를 잊은 채 다시 이념적 혼돈에 빠져드는 조국의 참담한 현실 탓이 아닐까.

세계 전사(戰史)상 가장 참혹했던 후퇴작전으로 불리는 장진호 전투에 미 해병대로 참전 했던 메링골로 씨는 왜 한국전에 참전했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조국의 부름을 받으면 어디든 간다. 난 한국인의 자유를 위해 싸웠다”고 대답했다. 이런 기록을 읽을 땐 빚진 사람의 심정과도 같다. 빚을 지고 갚지 않은 죄인의 심정 말이다.

‘181일간의 치열한 전쟁의 흔적, 한국전쟁’의 저자 더들리 휴즈는 갓 결혼한 신혼의 단 꿈을 접고 한국전쟁에 장교로 참전한 동기를 “세계 평화를 파괴하는 공산 집단의 침략에서 자유와 평화를 지키는 데 힘을 보태고자 낯설고 먼 한국까지 찾아왔다”고 설명했다.

그런데 한국 국민들의 생활과 생각은 그들의 숭고한 정신과는 한참 먼 거리에 있다. 6·25 전쟁의 약효(藥效)가 바래서일까, 아니면 종북(從北) 세력의 준동을 허용한 中道實用 탓일까, 정말 이대로 대한민국의 미래가 건전할 수 있을까.

가슴의 금배지 관점에서 국가를 보는 현 저질 정치인의 정신이 아니라, 후손들의 미래의 관점에서 자신을 보고 국가를 본 건국주역들과 호국선열들의 정신과 의지가 오늘의 대한민국 시대정신으로 자리매김 하는 중요한 계기가 6·25 전쟁 61주년을 맞아 이루어지길 하늘에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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