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정부가 성공한 이유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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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의 국제적 안목이 6•25남침전쟁에서 대한민국을 지켜냈다

그처럼 어렵게 태어난 대한민국은 건국된 지 2년도 못되어 일어난 1950년의 6•25남침전쟁으로 무너질 위기에 놓였다. 북한군의 남침(南侵) 사흘 만에 국군은 완전히 흩어지고 서울이 적군에게 점렴당했기 때문이다.

그 때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남침 다음 날 미군 전투기가 한반도 상공에 나타나고, 닷새째 되는 날 미(美) 육군 극동군 최고사령관인 맥아더 장군이 한국의 전선을 시찰할 정도로 미국이 발 빠르게 움직인 것이다. 동맹(同盟)도 맺지 않은 대한민국을 미국이 돕기 위해 그처럼 빨리 개입하리라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그처럼 미국이 신속한 참전 결정을 내리게 된 데는 소련에 대해 유화정책(宥和政策)에서 강경정책(强硬政策)으로 바꾼 정책변화가 중요했다. 하지만 그 못지않게 중요했던 것은 중요한 순간에 이승만 대통령이 두 중요한 미국인을 설득시킬 정도의 개인적인 친분을 가졌다는 사실이었다. 다행스럽게도 그 두 미국인은 6•25남침 당시 일본 도쿄에 있었다.

한 사람은 미극동육군총사령관인 맥아더 장군이었다. 이승만은 맥아더가 육군소령일 때부터 알고 있었다. 친분은 맥아더의 첫 부인의 아버지인 크롬웰이 이승만의 독립운동을 돕게 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크롬웰의 아들도 캐나다 주재 미국대사를 지낸 인물로서 ’한미협회’ 회장 자격으로 이승만의 독입운동을 열심히 도왔다.

또 한 사람은 미국 국무부 고문으로서 나중에 국무장관이 된 덜레스였다. 이승만과 덜레스는 대학 동창 관계였다. 이승만은 조지워싱턴대학을 졸업했는데, 덜레스는 그 대학의 법학대학원 출신이었다. 또한 이승만은 프린스턴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는데, 덜레스는 그 대학 학부 출신이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반공주의자(反共主義者)와 기독교인으로서 이념적인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덜레스는 6•25남침이 있기 일 주일 전 유엔의 명령으로 38선을 시찰하기 위해 한국에 왔다가 미국에 돌아가는 길에 도쿄에 머물던 상태였다.

6•25남침전쟁이 일어났을 때, 워싱턴의 미국 정부가 한반도와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던 고위층의 인물인 맥아더와 덜레스의 의견을 중요하게 생각했을 것은 물론이다. 그리고 그것은 이승만의 의견을 미국 정부에 전달할 수 있는 중요한 통로가 되었다. 그때 만일 이승만이 아닌 다른 사람이 대한민국 대통령이었다면, 미국은 대한민국이 공산권에 넘어 가도록 방치했을 지도 모른다. 바로 이러한 가정 때문에 북한과 공산주의자들은 이승만을 어느 누구 보다도 심하게 미워하게 된 것이다. 이승만이 없었더라면 남한의 공산화(共産化)가 성공했을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