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정부가 성공한 이유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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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의 현실주의적 안목이 대한민국의 건국을가능하게 했다

해방직후 미군이 진주한 남한은 좌익(左翼)과 우익(右翼)으로 갈려 혼란이 극심했다. 그러므로 남한에서만이라고 새 나라를 세우기 위해서는 두 파를 하나로 통합하는 좌우합작(左右合作)이 가장 중요한 과제로 떠오르게 되었다. 게다가 남한이 소련군이 진주한 북한과 합쳐 통일국가를 세우기 위해서는 남북협상(南北協商)을 통해 이루어지게 되는 남북합작(南北合作)이 보다 더 중요한 과제로 떠오르게 되었다.

당시에 많은 지식인들과 정치인들은 이처럼 어려운 장애물을 넘어 통일국가를 세우는 길은 민족주의(民族主義)의 명분 아래 온 민족이 단결하는 것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1948년 2월 10일 김구(金九)가 우는 심정으로 발표한 “3천만 동포에게 읍고(泣告)함”이란 성명서가 대중에게 큰 감동을 준 사실에서 나차나고 있다. 그 성명서는 만일 북한 협상을 해서도 통일국가(統一國家)건설이 안 되면38선을 베개 삼아 자결하겠다는 비장한 각오를 보인 것이었다. 너무나 옳은 주장이었기 때문에 당시 남한의 최고 지식인 108명이 그를 전폭적으로 지지하는 성명을 냈던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 당시 북한의 소련군과 공산주의자들은 남북협상을 통해 통일국가를 세울 마음이 전혀 없었다. 당시 북한은 단독정부를 세우라는 1945년 9월 20일자 스탈린의 지령에 따라 1946년 2월에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로 불리는 정부를 이미 세우고 빠른 속도로 공산혁명(共産革命)을 추진하고 있었다. 그런 때 통일정부를 세운다고 남한과 협상에 나서게 되면 지금까지 그들이 이룩해 놓은 모든 변혁을 허물어야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상황에서 남북이 통일되려면 남한도 북한처럼 공산혁명을 추진하는 길 밖에 없었다.

그 때문에 남북협상의 큰 꿈을 품고 평양에 간 김구•김 규식 일행은 아무 소득 없이 서울로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 일단 평양에 간 이상, 그들은 유엔 감시하의 선거가 가능한 남한만의 5•10선거로 대한민국을 세운다는 데 반대하는 이른바 ‘4•30성명’에 서명해 줄 수 밖에 없었다. 그 때문에 그들 남북협상파의 순수한 민족주의적인 동기는 북하의 목적에 이용당한 결과가 되었다.

이들과는 달리 이승만은 감상적인 민족주의를 벗어나 현실을 냉정하게 보고 있었다. 이승만이 볼 때,공산주의자들과 손을 잡고 통일정부를 세우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공산주의자들은 새 세상을 만들려는 혁명가(革命家)들이기 때문에 타협하고 양보할 마음이 전혀 없음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설사 타협이 이루어져 좌우합작의 연립정부(聯立政府)가 세워진다 하더라도, 결국은 공산화(共産化)되고 말 것이었다. 왜냐하면 조직이 약한 우파(右派)가 조직이 강한 좌파(左派)에게 먹힐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 같은 동유럽 국가들, 그리고 국공합작(國共合作)의 중국에서 그 같은 결과가 나타났던 것이다. 따라서 이승만에게 좌우합작이나 남북협상은 남한이 정부 수립을 못하도록 방해하여 혼란상태에 빠지게 함으로써 저절로 공산화하도록 만들려는 소련과 북한의 공작(工作)으로 보였던 것이다.

현실이 그렇다면, 우선 남한만이라도 급한 대로 임시정부를 세워 치안과 경제를 유지하고 국제적으로 인정을 받아 장차 북한과 통일할 방법을 찾는 것이 필요했다. 하지만 남한의 어느 지도자도 감히 그러한 주장을 할 용기를 보이지 못했다. 그런 주장을 하면 분단을 굳히려는 민족반역자로 비난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악역(惡役)을 맡을 용기를 가졌던 지도자는 이승만 뿐이었다. 그래서 1946년 6월 그의 유명한 ‘정읍발언(井邑發言)’이 나오게 된 것이다.

이승만이 온갖 비난을 무릅쓰는 용기를 보이자, 흩어졌던 우파들이 그를 중심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미국정부도 뒤늦게 현실을 깨닫고 소련과의 합의를 통해 좌우합작의 연립정부를 세우려던 정책을 버렸다. 그리고는 유엔총회가 ‘선거가 가능한 지역에서만이라도’ 자유선거를 통해 국가를 세우라는 결의를 내놓도록 정책을 바꾸었다. 이승만의 용기로 1948년 8월 15일의 대한민국 건국(建國)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