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정부가 성공한 이유 5.

이승만 정부가 성공한 이유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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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은 전시에도 선거를 할 정도로 자유민주주의의 기본을 존중했다

새로 탄생한 대한민국이 새로운 해양문화권(海洋文化圈)에 적응하기란 쉽지 않았다. 오랫동안 집단주의적이고 관념주의적인 ‘중국적 생활방식’에 젖어 있던 한국인들에게는 자유주의적이고 실용주의적인 ‘미국적 생활방식’은 낯설었기 때문이었다. 그 때문에 남한에서는 그것에 반대하는 시위와 폭동이 끊이지 않았다. 이와는 반대로 전체주의(全體主義) 국가인 북한은 조용하고 안정된 듯이 보였다.

새로운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타도하려는 혁명운동은 건국 당시부터 일어났다. 그 최초의 경우가 여수 주둔 국군14연대 안의 소수 좌익들이 일으킨 ‘여수•순천반란사건’이었다. 그 때문에 대한민국 정부는 공산주의자들의 활동을 금지하는 국가보안법(國家保安法)을 제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국가의 생존을 위해서는 혁명가(革命家)들의 자유를 제한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 때문에 이승만은 처음부터 독재자라는 비난을 받아야 할 운명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학고 이승만은 미국식 자유민주주의의 기본 틀만은 유지했다. 그는 오랜 미국 생활에서 ‘자유’의 의미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그는 6•25전쟁의 극한 상황에서도 선거를 중지하지 않았고, 그 이후로도 정기적으로 선거를 치렀다. 독재자 소리를 듣기는 했지만, 국회를 해산하거나 헌법을 정지시킬 정도의 독재는 하지 않았다. 대통령을 국회에서 뽑도록 된 간선제(間選制)를 폐지하고 국민이 직접 뽑는 직선제(直選制)를 도입했다. 의견이 다른 사람들은 언제나 있기 마련이라는 미국식 사고방식에 익숙해 있었기 때문에, 그의 집권기간에는 신문과 잡지들이 상당 정도 자유롭게 정부를 비판할 정도의 언론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그리고 여당과 야당이 대립하여 서로 견제할 수 있는 양당제도(兩黨制度 )도 나타낼 수 있었다.

1960년의 정부통령 선거에서 심한 부정행위가 드러나게 되면서 학생 시위의 압력을 받아 이승만은 대통령 자리에서 명예롭지 못하게 물러났다. 물러나면서도 그는,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력직에서 물러나겠다” “불의를 보고 일어 나지 않는국민은 죽은 국민이다”는 말로 반성하고 머리를 숙였다. 그것은 한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국민”이었던 미국인들과 40년을 같이 살면서 배운 겸손의 윤리였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오늘날 대한민국이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계속 유지해 가기 위해서는 ‘건국의 아버지’인 이승만을 비켜갈 수 없게 되었다. 싫든 좋든 간에 그는 대한민국의 이념적(理念的) 뿌리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